줄줄이사탕...
우리 형제들 말석 끄트머리에 놓인 제 위치로 인해
가족모두가 공감할만한 추억은 그리 많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추억 몇 가닥...
초등학교 6학년이던 72년 가을.
어느 날 대명동 집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 들었었습니다.
아마도 다른 집 새장에서 뛰쳐나온 잉꼬 새가 아니었던가 합니다.
잠시 푸닥거리한 끝에 결국 그 새는 내 손에 들어 오고 말았는데
혼자서 만지작 거리며 좋아하는 모습을 본 작은누나(미선母)가
'나도 좀 보자'며 새를 낚아채 가는 순간...
그만 새를 놓쳐 하늘로 날려 보내고 말았지요.
나는 분하고 원통하고 아까운 마음에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10분여를 주저앉아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다 못한 큰 누나가
이제 그만 울음 그치고 바람이나 쐬러 가자며
내 손을 이끌고 간 곳이 고산이었습니다.(시지동쯤 되겠지요.)
당시만 해도 한적했던 시골길.
왕복 2차선으로 길게 뻗은 길 양켠에는 코스모스가 가지런히 피었고
드문 드문 지나가는 찻길 옆으로 난 꽃 마당 안쪽에는 작은 찻집도 있었지요.
그 곳에서 차 한잔하며 누나는 음악도 한곡 주문했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길 다리아래 개울에서,
그리고 인근 초등학교에서 사진도 두어 장 찍었는데
아직도 제 앨범에 빛 바랜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누나였습니다.
* 당시 내게 조금이라도 철이 있었더라면
누나의 그 카메라를 달라고 해서
20대 꽃다운 우리 누나의 모습도 함께 찍어 두었을텐데...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눈물을 닦아요 그리고 날 봐요~"
길거리 온데마다 홍민의 '고별'이 흘러나오던 시절
당시 막 결혼한 새댁 작은누나가 대명동 친정엘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74년초쯤으로 기억합니다.
왜 그랬는지 자세한 전후사정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당시 수원비행장 관사에 살았던 작은누나는 나도 데리고 갔었지요.
가는 길에 잠시 대전(대흥동?) 시댁도 경유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중소도시까지 고속버스가 일반화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시외버스로 가는 수원까지의 시골길이 얼마나 멀고 지루했었던지...
그 곳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내가 뭘 했었던지는 별로 기억이 없지만,
작은누나가 차려 주었던 아침상에 놓인 김 뿌린 따뜻한 김칫국,
밖으로 난 창을 통해 방안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과 함께 했던
그 맛있는 냄새는 아직도 코 끝을 싸고 도는 듯 합니다.
대구로 올 때는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왔었는데
나 스스로 얼마나 대견스레 느껴졌던지...
대구에 내렸을 때 동대구터미널에서 들었던 노래,
지금도 어쩌다가 그 노래, 홍민의 '고별'을 들을 때면
그 때 그 정경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 오르곤 합니다.
나는 그 후로도 두 차례 혼자서 작은누나를 찾았었는데...
79. 2월. 대학 입학을 앞두고 사천비행장에 살던 누나를 찾았고,
80. 6월. 5.18사태로 비상계엄下 대학들이 장기휴교에 들어가 있을 때
지루함에 몸부림을 치다가 잠시 도피처로 당시 수원비행장에 계셨던
작은누나를 찾은 적이 있었지요.
답답하고 암울하다 싶었던 그 길고 길었던 시절.
내게 그렇게 숨 구멍이 되어 주었습니다.
高三, 대입을 준비하던 78년 가을.
정말 철이 없었던 나,
세상 좀 살고 나이가 든 지금에사 하는 말이지만...
대입시를 앞두고 초조한 마음에 딸리는 數學실력을 좀 키워 보려고
친구들처럼 나도 학원엘 가기로 마음먹고 반월당 대구학원을 점찍었지요.
며칠간을 별러서 어렵사리 큰 누나로부터 4,500원을 수강료로 얻었습니다.
(기억엔 그렇지만 아무려면 4,500원일까... 5,000원 쯤 주셨겠지요. ㅋㅋ)
기억나지 않는 피치 못할 어떤 사정으로 곧 바로 학원등록을 하지 못한 채
처음에는 별 의도없이 며칠간을 수강증없이 그냥 출입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盜講까지 넘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수중의 돈은 조금씩 줄어들고 ...
결국 몇 푼 잘라 쓰고 남은 돈으로 등록이 어려워 며칠간 더 그렇게 다니다가
수강증검사가 부담이 되었던 나는 그만 학원 출입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은 죄 탓에 대학입시 1차에 간발의 차이로 낙방하게 된 일이나
理科임에도 부족한 그 數學실력 탓에 후기 2차 시험은 눈높이를 낮추고
文科로 전향해서 商大로 지원했던 일...
그 후로 공부와 관련된 모든 고민과 기대 이하의 결과들은
마치 그 때 그 철 없었던 非行에서 비롯된 것인 것만 같아서
오랫동안 자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공부 잘 해서 훌륭한 사람되라고 어렵사리 만들어 준 그 귀한 돈.
그렇게 날려 먹은 罪. 벌받아 마땅하지...
누나... 고맙습니다.
- 2008. 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