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시간.
매일 반복되는 사무실 생활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계절을 호흡하며 스스로를 환기시키려고
어느 듯 가을이 내려앉은 광화문거리로 나섰습니다.
모처럼 점심약속도 없고 해서
혼자 거리를 좀 걷다가 발길 닫는 곳이 있으면
간단히 요기하고 사무실로 돌아올 생각이었지요.
* 남대문 삼성본관 ~ 덕수궁 ~ 광화문빌딩 ~ 세종문화회관
~ 교보빌딩 ~ 동아일보 ~ 덕수궁 ~ 삼성본관
덕수궁 앞을 지나는데 나이는 좀 드셨지만 다들 깔끔해 보이시는
세 분의 할머니(본인들은 억울하시겠지만)가 길에 서서 수다를 떨고 계십니다.
여고동창들인가? 행복해 보이는 얼굴... 나도 절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군밤장수가 벌써 길가에 진을 치고...
저 먼발치부터 가을바람에 실려 온 군밤냄새가 참 좋습니다.
하도 못 믿을 세상인지라... 수레에 수북이 쌓인 밤 위에응
"공주밤"이라 쓰인 딱지가 놓였습니다.
잿빛하늘아래 바쁜 길을 가는 행인들의 옷차림이 많이 무거워 보입니다.
10월 중순인데 벌써 버버리코트도 눈에 띄고 외투차림도 드물지 않네요.
가을은 남자가 멋있어지는 계절이라는데...
간단히 요기를 하고
길 건너에 있는 교보서적에 갔습니다.
20여분 여유시간동안 신간들을 두루 둘러보았는데
눈에 띄는 책이 있어 두 권 - 이어령시집(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시베리아 몽골 횡단기행 - 을 샀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대학시절 교수님의 저서 "저 물레에서 운명의 실이..." 읽고
나름 내 인식에 각인된 존경해 온 분, 최근 기독교로 입문, 귀의했답니다.
당신은 그 동안 많은 책을 만들었지만 시집은 처음이라고 했지요.
"시베리아 ~ "는 나중에 제가 회사를 졸업하고 나면 언젠가 아들녀석 데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유럽'까지 꼭 한 번 가 보리라...
평소 생각해 오던 터에 훌륭하신 어떤 분이 나보다 먼저 그 위대한 일을 해 내고
책까지 꾸며냈기에 반가운 마음에 보자마자 냉큼 담았습니다.
찬가을 한자락이
은은히 내안으로 스며든다.
참 고마운 일이다.
광화문 교보빌딩 전면 걸개에 크게 쓰인 글입니다.
때마다 아름다운 글로 계절을 알리는 전령사 노릇을 하지요.
내달이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이 남대문에서 강 건너 서초동으로 이전합니다.
삼성전자의 40년 강북 역사를 뒤로하고 강남의 새로운 장을 여는 순간입니다.
어쨌든 앞으로 또 다시 이 길을 걷는 일은 더 없을 듯 해서 아쉽기만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덕수궁 앞을 지나면서 바쁘더라도 하루만 더 시간을 만들어
덕수궁도, 돌담길도 한 번 걸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을이 무르익고 있습니다.
- 2008.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