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긴 세월동안 서로 보지 못한 채
막연히 그러하리라 생각해 온 바로 그 모습으로
그녀의 자리를 아름답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몇 해전 누군가가 전해준 그녀의 전화번호,
오랜 망설임 끝에...
결국 그녀의 자리를 한 번 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보름전, 오늘을 약속해 두고
어제 전화로 샘터파랑새극장 앞에서 보기로 하였지요.
그녀가 그랬습니다. 거기서 만나자고.
이렇게 일을 저지른 후 설램으로 오늘을 기다리면서
내 마음 한켠에서는 괜히 부질없는 짓 하는 건 아닌지
마음여린 염려도 없진 않았습니다.
어렵게 그녀와 마주했는데 혹시나, 정말 혹시라도
너무 오랫동안 각기 지내 온 다른 세월로 인해
본디 모습이 달라져 있으면 어떡하나...
서로 함께 나눌 얘깃거리가 모자라 도중에
대화라도 끊길라치면 그 적막을 어떻게 감당하나...
나보다도 순조롭고 윤기있는 삶을 누리며
곱게 나이를 더해왔으면 참 좋겠는데...
혹여 긴 세월 마음에 담고 보듬어 온 그 추억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으면 어떡하나...
그도 아니면...
어쩌다가 둘만의 자리가 부담스러워지는
그 어떤 순간이라도 만나게 되면
이렇게 숫기없는 내가 어떻게 그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을까? ...
엊그제 대구사는 친구 녀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모레 그녀를 만날 거라는 얘기를 전했지요.
그 넘은 교정에서 당시 나를 스쳐 가는 그녀를
안타까움으로 함께 지켜 보았던 녀석입니다.
"야 야~ 이제와서 늙은 둘이 만나서 뭐 할라꼬?...
치아라! 임마!!"
전화기를 통해 전해진 그 녀석의 기우 한점 담긴,
그렇지만 말뿐인 만류도 있었습니다.
11시에 만나 5시까지.
동숭동 대학로 인근에서 茶, 점심, 茶...
우리는 이렇게 자리를 옮기면서
무려 6시간을 마주하며 보냈지요.
평소 모자라는 말주변 탓에 어디를 가든
그저 조용히 구석자리만을 지켜 오던 내가
오늘은 평소 나답지 않게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그녀와의 이 자리를 기대하면서
미리 몇 가지 얘깃거리들을
생각해 두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와 조우하는 순간...
지나 온 20여년의 긴 공백은, 서로의 다른 세월은
마음 한구석에 어른거리던 여러 기우들과 함께
일순간 눈 녹듯 사라지고 대신
옛 친구의 편안함이 조용히 와 닿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졌던 것이지요.
가히 이 시대 이 나라의 국민적 관심사가 된
정치, 교육, 부동산... 하다 못해 요즘 세간의 화제인
월드컵축구에 대해서 조차 한마디 언급없이
그녀나 나나 그 긴 시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의 얘기에만 몰입했던 것 같습니다.
각자의 마음에 담겨진 추억들, 풋풋했던 시절
우리와 동시대를 보낸 주변 친구와 선후배들,
서로가 가정을 이루어 지금껏 살아온 여정,
배우자와 자녀들,삶의 비전과 꿈, 신앙...
이런 얘기들을 서로 담담하게 나누었지요.
아,
그 옛날 애매하게 서로 스치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1980년, 대학 2학년 늦가을 어느 날,
"우리 이제 서로 말을 편하게 하면 어떨까...요?"
그녀와 함께 했던 학교행사가 늦게 끝나
집으로 바래다 주던 길,
그간 학교생활을 통해 서로를 좀 알고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라
조금은 가까워진 듯 여겨졌던지
함께 탄 버스 안에서 그녀가
조심스레 꺼낸 말이었습니다.
사내라지만 숫기라고는 전혀 없었던,
정말 쑥맥같기만 했던 나는
순간 '이 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결국... 그 후로도 내내 敬語로 일관했지요.
갓 스무살 애들이 서로 깍듯하게 경어를 쓰는 모습.
지금 생각해 보면... ㅋㅋ
그러나 긴 세월의 강을 건너 지금에 생각해 보니
오히려 잘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나눈 많은 얘기들 가운데는 분명 어렸을 적
그 '어린 말투'로는 감당키 어려운 세월의 무게와
나름의 감정들이 버무려져 담겨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
나는 생각했었습니다.
오늘 이 만남이면 그 동안, 그 오랜 시간동안
내 마음에 쟁여져 있던 숱한 기억들이, 얘깃거리들이,
감정 조각들이 쉬 비워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이 시간쯤에는 담담함으로 담백해진 내 마음을
발견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 다시 이만한 세월을 서로 살다 보면
그 땐 또 다른 무언가가 쌓일 수도 있겠지...
그러면... 훗날 언젠가 좀 더 늙어진 모습으로
그들을 털어 낼 자리를 또 만들면 되고...
나는 세상 일은 모두 이렇게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비웠다고 생각한 자리가
오히려 더 채워져 있었습니다.(中略)
딸 부잣집 맏이면서도 그 옛날부터 딸 많이 낳아
예쁘게 키우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졌던 그녀는
정말 그 희망대로 딸 셋을 예쁘게 키우고 있었습니다.
성악을 전공했던 그녀는 그 좋아하던 노래로
어린이교육, 사회참여, 교회봉사를 하며
그렇게 바쁜 생활을 살면서도
삶을 정말로 참하게 수놓아 가고 있었습니다.
최근 동요작곡을 시작했는데 시작하고 보니 너무 어려워
공부를 좀 더 해야만 할 것 같다고...
진정 아름답게 나이를 더해 가고 있는 그녀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서로 보지 못한 채
어쩌면 그러하리라 생각해 온 바로 그 모습으로
그녀의 자리를 참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대화중에 날더러 '훨씬 더 좋아 보인다'며
밝게 표정짓는 그녀를 보면서
그냥 나 듣기 좋으라고 배려해서 하는
그런 얘기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오늘만은 그것이 그녀의 속 마음이었으리라...
이렇게 믿기로 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워 보이는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내 안에서, 단정히 그리고 멋있게 나이들고 싶은
중년남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먼 훗날 언젠가 또 다른 계기를 통해
서로의 자리를 확인할 수 있을 재회가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오늘, 그 오랜 만남 후 아무런 기약없이 그녀를 보냈습니다.
앞으로도 내내 본디 내 모습을 잘 간직하며 살리라
다짐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좋은 옛 여자친구...
양립이 쉽지 않은 명제를
대견하게도 소중히 잘 간수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오늘 후한 점수를 주기로 했습니다.
- 사랑하는 가족과의 만남을 보름 앞둔,
2006. 6.17일 토요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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